고려의 무장 지채문과 2차 여요(고려거란)전쟁의 시작
지채문은 1010년 2차 고려-거란 전쟁 때 서경성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우고 피난을 떠난 현종을 지킨 고려의 무장입니다.
당시 거란은 1004년 전연의 맹약 이후 송나라에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자 이제 고려를 다시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고려에서는 1009년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이 폐위되고, 강조가 현종을 새 왕으로 추대하는데 거란은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이 때 거란의 성종은 대역죄인 강조를 처벌한다는 명분과 함께 직접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서희가 협상을 통해 얻은 고려의 강동6주 방면을 통해 침공을 시작합니다.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지채문은 천리장성의 남쪽인 함경남도 화주(현재 금야읍)의 방어를 맡고 있었습니다. 흥화진과 강동 6주의 고려군이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며 시간을 확보하는 사이 지채문은 서경을 지키기 위해 동북면의 군사를 이끌고 이동합니다.
서경성 전투
하지만 지채문이 서경에 도착하기 전, 이미 고려의 주력인 강조의 군대가 패배하여 흩어진 상태였고 서경성은 항복을 결심한 상태였습니다. 지채문은 거란에 항복을 결심하고 성문을 닫은 서경성의 장수를 겨우 설득해 성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거란군에 항복 문서를 넘긴 상태였습니다.
거란군에 맞서 항전하자는 지채문의 설득이 통하지 않자 지채문은 몰래 성 밖의 거란 진영을 급습해 항복문서를 불태우고 이후 동북면에서 도순검사 탁사정이 본군을 데려오자 함께 서경성을 장악하고 거란군에 맞서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채문은 거란에 맞서 성 밖으로 나가 거란의 기병을 격파하는 등 연이은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마탄 전투에서 적의 함정에 빠져 패배하고, 이후 개경으로 피해 서경의 소식을 전하고 현종의 곁을 지키게 됩니다.
한편 서경성은 탁사정이 발해의 왕족으로 1차 고려거란전쟁때에도 큰 활약을 한 대도수를 속여 미끼로 적에게 내몰고 자신은 반대 성문을 통해 도망을 치면서 더욱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려군의 패배와 지휘부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서경성의 사람들이 끝까지 항전하면서 다행히 끝까지 서경성을 사수하는데 성공합니다.
흥화진과 서경성 등이 끝까지 거란에 무너지지 않고 성을 지켜내면서 거란의 후방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결국 거란은 전쟁을 길게 가져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현종을 피난 길을 끝까지 지킨 지채문
개경으로온 지채문은 강감찬의 조언에 따라 남쪽으로 피신하는 현종을 끝까지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강조의 정변으로 왕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현종의 피난길은 매우 험난하였습니다.
아직 지방에서는 왕권보다 호족의 세력이 더 큰 상황이었고 강조의 정변에 참여한 하공진이 다시 정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대부분의 신하들이 현종의 곁을 지키지 않고 달아난 가운데 마지막까지 지채문은 현종을 호위하였습니다.
거란군이 물러가고 현종이 지채문에게 내린 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짐이 도적을 피하려고 경황 없이 먼 길을 갔으나, 따르는 신료들중 도망가고 흩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오직 채문 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쓰고 산 넘고 물 건너며 말고삐를 잡는 수고를 꺼리지 않으면서, 끝까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켜냈느니라. 참으로 뛰어나고 본받아야 할 점이 많으니, 어찌 남다른 은혜 베풀기를 아까워하겠는가?”
이후 1026년 상서우복야에까지 올랐다는 기록이 있으나 강감찬이 활약한 3차 고려거란전쟁 때에는 지채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